야호 러시아 간다~~~

야호에서 국제 교류의 일환으로 러시아에 간다죠?

러시아를 가기 전에 짜잔 사전 모임.

 

러시아 연해주는 왜 가는 건가요?

  1. 문화 다양성에 대한 시각을 넓히기 위한 첫 시도
  2. 로지나 학당과의 교류로 야호의 공익적, 사회적 의미를 다짐
  3. 고려인, 러시아, 북유럽 등으로 점차 문화예술인 및 예술 단체 교류를 추진.
  4. 활발한 해외 교류의 밑거름.
  5. 국제 교류 지원 사업의 발판 마련.
  6. 농산가공품에 대한 정보 및 교류(꾸러미 관련)

 

연해주는 ?

연해주 한인의 역사

 

연해주는 한반도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과거 신석기시대까지 굳이 올라가보면,

유물을 통해 살펴봤을 때 우리나라의 문화와 동질성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우리의 선조인 고구려와 발해가 그곳에 문화를 꽃피웠던 지역이다.

하지만 발해의 멸망을 끝으로 한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그후 오랜 기간 우리에게 잊혀진 땅이 됐다. 이후 그 땅은 러시아인이나 중국인, 그리고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한민족이 연해주와 새로운 인연을 맺기 시작한 시기는 철종연간인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연해주 한인 성립기 (1860~1937)

1860년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13가구가 정착함으로써 연해주 한인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됐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민이 진행됐는데 그 이유는 조선 내의 경제적 문제(대기근 등) 혹은 정치적 문제(경술국치 등)등에 의한 것이었다. 1869년에는 한반도에 큰 흉년이 들어 농토가 적은 동북부에 특히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기근으로 굶주린 많은 수의 한인이 월경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와 같이 연해주지역에 대한 한인의 이주가 계속 증가하면서 여러 지역에 한인마을이 형성됐다.

1905년 일본의 외교권 강탈은 한인의 연해주 이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은 한인의 해외이주를 억제했는데, 이에 따라 이전까지 러시아로 향했던 순수 농업이민은 소위 불법적인 망명이민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후의 러시아 이주는 경제적 동기 외에 정치적 동기에 의한 이주를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연해주로 이주한 많은 수의 한인은 연해주 각지에서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나섰다. 일례로 1908년 한해에만 총 69,804명의 의병이 1,451회 무장출동을 했으며, 이와 더불어 연해주 한인 지도자들은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혼 고양을 목적으로 연해주에 11개 학교와 <대동공보>,<해조신문>등의 언론사를 설립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됐다. 이에 많은 러시아 거주 한인이 귀국을 포기하고 러시아에 귀화했다. 당시 귀화는 개인적 신청보다는 집단적 청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한인은 강한 개척정신과 성실한 활동을 통해 사회적 차별과 불리한 조건을 극복했다. 8월 한일합방이 전해지자 러시아 한인들도 이를 규탄하고 국권회복의 노력을 전개했다. 일례로 러시아 한인의 모임인 성명회 회원 700명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한인학교에 모여 한일합방 무효를 선언한 후, 이를 블라디보스톡 각 영사관에 통보하고 거리에 격문을 붙이는 한편 한국독립선언서에 8,624명의 받아 미 국무장관에게 발송했다. 이러한 정치적 대격변을 겪은 후에도 연해주의 한인 수는 계속 증가했지만, 혁명 러시아는 한인들의 안락한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벼농사를 통해 여유있는 생활을할 수 있었던 한인들에게 혁명러시아는 이미 부의 축적을 허용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즉 사유제를 폐지하고 집단농장을 만들어 개인토지를 몰수하는 한편, 부유한 농민을 제거하기 위한 토호청산을 실시함으로써 연해주 한인의 기반은 급속히 약화됐다.

이에 더해 1930년대 소련과 일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연해주 한인은 이제 국제정치의 희생양이 돼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됐다. 1931년 만주까지 점령한 일본군은 연해주의 소련군과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자주 충돌했다. 소련은 이미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한 경험이 있어 일본과의 충돌을 원치 않던 터에 일본인과 구별되지 않는 한인들의 존재가 부담이 됐으며, 그들이 일본의 첩자노릇을 했다는 것이 강제이주의 가장 중요한 구실이었다. 우선 스탈린은 한인 강제이주 직전 식자들을 모두 처형해 반항세력을 사전에 제거했다. 1936년 한인 지도급 인사 2,500여 명이 스탈린의 지시로 처단됐다.

 

2)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및 정착기

① 강제이주기(1937~1938)

1928~1930년 소규모의 강제이주를 끌어가던 소련공산당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강박증이 더해갔다. 그리고 1937년 8월21일 소련인민위원회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극동 변경지역에서 한인을 이주시킨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그 공식적인 이유는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의 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에서 이주의 진정한 목적이 그대로 드러났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한인 강제이주의 동기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인 첩자 침투 방지라는 이유가 정책 입안자의 편집적 증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단지 한인을 추방하려는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한인 강제이주의 실질적 동기는 오히려 극동에서 한인을 제거하려는 오래된 러시아 쇼비니즘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이주 규모는 9월 21일자로 완료된 1차 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21,296명 우즈베키스탄으로 30,003명이 이주돼 이주규모는 총 10,369가구 51,299명이라고 기록에 남아있다. 2차 이주는 9월24일부터 실시됐다. 1차 이주 때 동원됐던 열차가 39대였던 데 비해 2차 이주 때에는 85대의 열차가 동원됐다. 1차이주가 주로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속히 이주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2차 이주는 극동지방 전역의 한인들을 모두 이주시키는 것이였다. 1937년 10월 25일에 한인 이주사업이 기본적으로 완결됐는데, 총124대의 수송열차가 투입되어 171,781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송됐었다. 이상과 같은 강제이송 과정에서 한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반발을 철저히 탄압하기 위해 한인들을 자의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하는 계획과 동시에 진행됐다.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는 결코 편안한 여행이 아니었다. 한인들은 “먹을 것을 전혀 공급받지 못해”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서면 간이상점에 뛰어가 빵 등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 먹으면서”여행을 했다. 또 열차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 역 구내에 열차가 서면 모두가 내려서 대소변을 본다고 해 러시아인들은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열차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아이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여서 이주 중에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발생, 아이들의 사망률이 60%를 상회했다고 한다. 또한 이주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지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다수 생겨났으며 크고 작은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② 정착기(1939~1991)

한인들은 극동에서 40여 일간 1만여Km를 달리는 기나긴 기차여행으로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반사막지대로 건조한 한편, 여름에는 40도로 무덥고 겨울에는 몹시 추웠다. 또한 한인들이 극동에서 겪어 보지 못한 학질과 풍토병이 이들을 괴롭혔으며, 이로 인해 많은 수의 한인이 사망하거나 큰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별 준비도 없이 단지 한인들을 추방시켜야 한다는 목적만을 가지고 강제이주를 추진했기 때문에 의사나 의료시설조차 전무한 상태였으며, 한인 의사들은 이미 인텔리대표로 숙청당한 후였기에 많은 이들이 불가피하게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에 따른 희생은 자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또 이주 후 한인들은 사회의 각종 지도적 위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전쟁 때는 한인들을 믿지 못해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 민족을 감추고 전선에 나간 한인은 몇몇 있지만 대부분의 한인은 전선에 나서는 대신 강제노동 및 중과에 시달렸다. 이때 한인들이 당한 피해는 심리적으로도 큰 상처를 주어 재소한인의 외상으로 남아 이후 이들의 성격형성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됐다. 그리고 1937년 강제 이주 당시 한인들에게는 일정한 거주구역이 명시된, 즉 거주지가 제한된 신분증이 배부되어, 이로써 한인은 내륙에 갇힌 포로가 됐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적어도 1953년까지, 즉 강제이주 후에도 16년간 집단적으로 죄수 아닌 죄수 생활을 하게 됐다.

한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38년 스탈린의 특명으로 한국어를 소련 내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함으로써 한인에 대한 민족교육이 금지되고, 적성민족으로서 공화국외의 다른 지역을 여행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복무도 할 수 없고 국가기관 취업 및 취학이 제한됐으며, 사회정치적 진출이 봉쇄되는 등 한인은 마치 적국의 포로와도 같은 차별대우를 묵묵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과거 소비에트의 대한인 이민정책이었는데 이러한 한인 억압정책에 대한 소련정보의 공식적 인정과 복권은 1989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소련정부의 민족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로 바꾸고, 그곳에 쌀, 야채, 목화 등을 재배해 성공함으로써 소련 중앙아시아의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새롭게 일어설 수 있었다.

 

③ 연해주 재이주기(1992~현재)

1991년 소연방의 해체와 새로운 신생독립국들의 독립은 50여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왔던 한인들에게 새로운 시련의 계기가 됐다. 즉 중앙아시아 신생독립국들의 탈 소련화 정책으로 인해 자국 민족언어정책과 민족주의 등이 출현함으로써, 소수민족인 한인들은 많은 역차별적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재 많은 수의 한인들이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떠나 선조들의 원거주지였던 극동 러시아, 연해주로 재이주하고 있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3) 현 황

현 러시아연방을 포함한 구소련 내 한인은 약45만 명으로 인구수에서 120여 개 민족 중 25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연방 내에는 약10만 명이 거주하고 있고, 구소련령인 중앙아시아 지역의 우즈베키스탄에 약22만 명, 카자흐스탄에 약10만명, 키르기즈스탄에 2만 명 등이 분포돼 있다. 연해주에는 강제 이주됐다 귀환해 생존투쟁을 벌이고 있고 한인들이 아직 집단촌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흩어져 살고 있고, 사할린에는 대부분 1939~45년 일본이 징용해 당시 일본 지배하에 있던 남부사할린에 강제 이주시킨 15만 한인 가운데 종전과 함께 송환되지 못하고 잔류한 4만 3천 명의 한인과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스탈린 정권때 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녀교육에 힘쓴 한인들의 2,3세 다수가 과학기술자, 의사, 교수, 교원, 법률가, 건축가 등 전문직과 정치행정직에 진출해 이 지역 여타 소수민족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소연방의 해체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토착민족 공화국이 건설됨으로써 이 지역 한인사회는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그 인접지역에 눌러 사느냐 아니면 연해주로 귀환하느냐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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